'20. 2. 1.
야호, 오랜만에 혼산이다. 내일 지리산 만복대를 가기 전에 하루 일찍 구례에 와서 지리산 서북에 위치한 바래봉을 가기로 했다. 날씨가 따땃해져서 눈이 어느정도 녹았을 거라 생각하고 큰 기대없이 남원에 위치한 전라북도학생수련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울산은 정말 전국을 다니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힘든 곳입니다. 어쩌다 내가 울산에 살게되어 매주 2~3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게 되었는지, 먹고살면서 등산다니기 정말 힘이 드네요.
지난 소모임을 통해 바래봉은 한차례 다녀갔었는데. 지난주에도 지리산 서북능선의 일부인 고기리 - 큰고리봉(1,305m) - 세걸산(1,216m) - 세동치(1,110m) - 전라북도학생수련원을 걸었습니다. 원래는 정령치(1,172m)에서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정령치로 오르는 도로가 겨울철 폐쇄되어 큰고리봉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다수 소요된 듯한데, 제 늦잠도 한몫했네요.. 그래서 바래봉으로 향하는 세운치, 부운치, 팔랑치를 가지 못한게 참 아쉬웠습니다.
그때의 아쉬움을 해소하고자 오늘은 전라북도학생수련원을 들머리로 세운치(1,110m), 부운치(1,140m), 팔랑치(1,010m), 바래봉(1,167m)을 지나 운지사를 날머리로 잡았습니다. 수련원에 차를 세우고 사랑1번지 전라북도 남원 건물을 지난다. 늘 겨울 등산은 화장실이 문제라서 꼭 시작점에 화장실을 들르고 물은 되도록 먹지 않는다. 이럴때는 남자들이 부럽네요. 하하하
수련원에서 세운치(1,110m)로 올라가는 곳은 정비된 계단과 임도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다가 등로가 나타나는데 그때부터 너무 예뻐 한걸음 걷다 사진찍고 두걸음 걷다 사진찍고 연신 고프로를 귀찮게 했네요. 사실 눈을 그렇게 기대한 건 아니였는데, 어쩜 이리도 어여삐 나를 여겨 설경을 보여주는지, 지리산은 정말 선물같은 존재입니다.
올라가는 길목에 사랑스러운 하트가 그러져있네요. 먼저 올라간 등산객의 마음에도 제맘처럼 사랑이 가능한가 봅니다. 1시간 가량 걸었을까요. 세운치(1,110m)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 저랑 같은 방향으로 걸으시는 분들이 많네요. 익히 알려진 바래봉 등산코스라 많은 사람이 있을거라 예상은 했는데, 10시 넘게 시작한 등산이라 생각보다 한산합니다. 지금부터는 힘든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능선을 걷노라면 정말 세상 끝까지도 갈 수 있을 듯 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드뎌 부운치(浮雲峙)가 보입니다. 치라는게 재를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처음 수련원에서 능선까지 올라오는 세운치에서 능선을 살짝 걷다보면 부운치에 도착합니다. 높이 1,140m에 위치한 부운치의 부운은 주로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곡풍의 찬 습기가 태양에 노출된 산 위로 올라오면서 수증기화되어 구름이 피어오르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해발고도가 높다는 의미겠죠.
사실 부운치~팔랑치~바래봉 구간이 사부작 걷기도 좋고 봄철 철쭉명소로 엄청 유명하죠. 저도 아직 바래봉 철쭉을 보지 못해 다가오는 봄에는 꼭 보러가고 싶습니다. 그때는 정령치부터 시작해서 바래봉 하산코스로 말이죠b. 부운치에서 팔랑치를 가는 길은 개인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오르막길과 데크길이 있는데요. 오르막길 옆에 놓여있는 큰 바위위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면 멀리 세걸산과 큰고리봉이 보입니다. 물론 산 아래 위치한 집들도 옹기종기 보이구요. 날씨가 좋았지만 역시나 바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바람에 취약한 제 머리도 이리저리 힘없이 흩날리네요. 개인적으로 등산하면서 예쁜모습을 유지하시는 유수 인슈스, 블슈스 분들 존경스럽습니다. 대단합니다.b
팔랑치는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쫓기던 진한 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유곡에 찾아들어 달궁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 때, 북쪽에 8명의 장수를 세워 지키게 하여 팔랑재(팔랑치)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하죠. 이렇게 이름만큼 귀여운 팔랑치를 팔랑팔랑 걸어가다보면 저 멀리 바래봉이 보입니다. 바래봉은 많은 분들이 아시듯이, 스님의 밥그릇이라는 바리때라는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는데요 바리때를 뒤집어 놓은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바래봉이라는 이름이 붙어졌습니다. 지리산 주요 고지에서 바래봉을 보면 정말 동그랗게 생겼는데요. 특히 겨울철 만복대에서 바라본 바래봉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어 더 예쁘게 보입니다.
마지막 바래봉에 오르기 전 코스는 절정입니다. 바래봉 삼거리부터 시작되는 평평한 길에 길쭉길쭉 팔벌려 환영해주는 키다리 나무들과 나즈막하게 풍성한 강호동 나무들이 양옆으로 저를 환영합니다. 특히 나무 가지가지마다 내려않은 눈은 제 걸을음 더욱 즐겁게 합니다. 그렇게 정비된 길과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소박하지만 결코 왜소하지 않은 바래봉을 만나게 됩니다.
바래봉 정상석 주위로 오늘은 한적합니다. 역시 조금 늦게 올라야 정상석을 온전히 느낄 수 있나 봅니다. 나무데크 가운데 새색시가 다소곳이 절을 하고 있는 것마냥 보이는 정상석이 참 참해보입니다. 바래봉에서 사진 한장을 박고 이제 운지사로 내려옵니다. 눈이 조금만 쌓이면 썰매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품은채 넘어지지 않게 뒤꿈치에 힘을 주고 조심조심 내려옵니다. 바래봉에서 운지사로 내려오는 길에 느지막히 일몰을 느끼러 올라오는 커플이 보이네요. 야광조끼를 입은 댕댕이도 한마리 함께합니다. 귀엽네요.
용산주차장에 도착했지만 제 차는 여전히 수련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택시를 타고 수련원에서 용산주차장으로 왔었는데 1만6천원인가 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는 걸어서 가보기로 합니다. 구글지도를 열어 마을을 지나 다리를 건너 작은 천을 따라 걸어갑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람천>이라구 하네요.
멀리 보이는 산능성이 너머 해가 집니다. 겨울산행에 필수품 헤드랜턴을 안가져온 것이 생각나 갑자기 다급해졌습니다. 그치만 일몰과 람천, 억새와 어우러진 산능성이가 너무 예뻐 잠시 풍경에 빠져봅니다.
그렇게 2시간 가까이를 걸어 드디어 수련원 오르막길 전 마을에 진입했습니다. 동네개가 가까이 다가와 짓으며 물듯이 으르렁거리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이났습니다. 다행히 주인이 부르니 다시 귀여운 댕댕이마냥 돌아가네요. 수련원 가는 길 왼쪽에 큰 보호수가 있는데 보호수 아래 위치한 마을평상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네요. 바래봉 등산도 좋았지만 람천을 따라 걸으며 본 일몰과 마을 보호수 아래 누워 본 하늘 또한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래봉에 다녀간 제 마음을 담은 시구를 공유합니다.
지리산 자락에 포근히 내려앉은
폭신한 구름을 사부작 밟으며
팔랑팔랑 나부대던 설렌가슴
둥근 바래봉에 사뿐히 담아놓고는
유난히 커보였던 불그스런 기대감이
지리산 너머로 사라질때쯔음
내옆을 스쳐간 불빛을 다시잡아
바래봉에 담아둔 그 마음을 드립니다.
'아웃도어ㅣOUTDOO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종석대 : 천은사 ~ 법성봉재 ~ 차일봉 ~ 우번암 ~ 종석대 ~ 상선암 ~ 천은사골 (0) | 2020.03.02 |
---|---|
영남알프스 가지산 : 석남터널 ~ 입석대 ~ 입석봉 ~ 가지산삼거리 ~ 중봉 ~ 가지산 정상 ~ 중봉 ~ 석남터널 (0) | 2020.03.02 |
지리산 만복대 : 상위마을 ~ 왼골 ~ 만복대 ~ 묘봉치 ~ 상위마을 (0) | 2020.02.27 |
지리산 반야봉 : 성삼재 ~ 노고단 ~ 돼지령 ~ 임걸령 ~ 노루목 ~ 묘향대 ~ 반야봉 ~ 성삼재 (0) | 2020.02.26 |
덕유산 육구종주 : 육십령 ~ 할미봉 ~ 서봉 ~ 남덕유산 ~ 삿갓봉 ~ 삿갓재대피소 ~ 무룡산 ~ 백암봉 ~ 중봉 ~ 향적봉~ 구천동 (3) | 2020.02.26 |